파리에서 그를 만나다 2001/8/9

빠리에서 그를 만났다
아주 어색한 자리에서
변기만 놓여 있는 화장실안,
궁서에 세로로 찍힌 한편의 시가 있다

시를 읽어가다가 한대목에서
몇년전 연애편지를 떠올린다
'서걱거림'
가득 찬 공허를 긁어내는 소리

오랫동안 그를 피해왔다
어떤 위안도 주지않았고
결의도 북돋우지 않았다
그는 냉철하고 날카롭다
그 때문에 ...

이제는
그를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후회하지 않는 것은
극복이나 망각이기에.


뼈아픈 후회 - 황지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自請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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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05-03-12 09:4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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