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일이 없는 한가한 날이면 두 사람은 각자 편한 자세로 침대에 눕거나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책을 보곤 했다.

하루는 내게 읽고 있던 소설을 소리내어 들려 주었다. 작가가 누구인지 장르를 떠나 소설 내용을 몰라도, 편히 누워 그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건 그 자체로 작은 평화였다. 소설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로맹 가리의 자전적 소설이었고 얼마전 산 책에서 로맹 가리 연보를 찾아 기억을 더듬어 책 제목을 알아냈다. 벽의 약속. 아직도 그 책 내용을 알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책 제목처럼 그 친구가 건넨 약속이었다.

책을 읽어 주며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일주일에 한번씩 내가 이 책을 읽어 주면 어떨까? 한번에 한 장을 읽으면 앞으로 30여 주는 더 만날 수 있겠지?"

나는 그럴까하고 대답한다.

그 이전까지 두 사람은 관계를 지속적으로 엮거나 속박하는 약속이나 전제를 하지 않았다. 그 뒤로 이따금 그 책을 읽어주곤 했다. 그 책을 끝까지 읽지는 않았지만 그 시간 이상으로 계속 만났다.

로맹 가리는, 예나 지금이나 낯선 존재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소설로는 초등학교 시절 위인전류나 문고판 몇 권 겨우 읽었을 뿐이었다. 대학이란 공간에서는 사회과학 서적만 봤을 뿐이다, 문학은 잠시 머리 식힐 요량으로 읽었으니, 로맹 가리나 그의 텍스트는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내가 아는 건 로맹 가리가 아니라 에밀 아자르 밖에 없었다.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는 실재적으로 동일 인물이라고 하지만 두 작가의 텍스트에서는 실존적으로 타자들일 뿐이다. 그녀는 내게 로맹 가리를 읽어 주었지만 시간이 지나서도 나는 에밀 아자르만을 읽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또다른 존재를 감지하지 못한 채.


집에서 올라오는 기차를 기다리다 시간이 조금 남아 서점에 들렸다. 경제경영서적과 신간 서적이 뒤섞여 있는 코너에서 눈을 끄는 책을 보았다. 로맹 가리. 인문학 책은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지만, 이 책에 대한 이끌림은 어쩔 수 없었다.

로맹 가리 때문에, 책꽂이를 한참 뒤져서 에밀 아자르 책을 꺼내 다시 읽고 있다. -- JongYeob 2006-10-27 14: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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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06-10-27 14: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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