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사람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써 보냈던 편지이다.
이 편지를 받았던 사람을 내 마음을 알았을까? 시간이 지난 지금 추측해 보면 아마 아니었나 보다.
설령 그렇다해도 마음을 닫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려면 어떠냐.
이 편지를 받았던 사람을 내 마음을 알았을까? 시간이 지난 지금 추측해 보면 아마 아니었나 보다.
설령 그렇다해도 마음을 닫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려면 어떠냐.
이 편지는 내가 2001년 대전에서 한참 고생하던 4월경에 썼다.
식목일부터 일요일까지 짧은 휴가를 받아 부산에 다녀왔습니다. 관세청 프로젝트가 막바지이고 남은 3주동안 전쟁같은 하루 하루를 보내야 하기 때문에 체력 비축 삼아 다녀왔습니다.
약 6개월만에 집에 내려간듯합니다. 언제 부산에 가 봤는지 잘 기억이 안 날 정도입니다. 지난 한가위에도 설에도 못 갔으니까요.
식목일 12시 쯤에 부산역에 도착하니 부모님이 마중 나오셨더군요. 학교 다닐 때부터 집에 내려가면 곧잘 마중나오셨습니다. 이제 서른이 다 되어가는데도 손수 차를 가지고 오셔서 집에 자주 오지 못하는 못난 아들래미를 환대해 주시더군요. 어머니는 기차역 출구까지 나오셨고 아버지는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멀찍이서 아버지의 희끗한 머리가 눈에 띄더군요. 오래간만에 집에 가면 부모님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인정하고 싶은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몇여년전부터 어머니가 노후에 시골에 가서 살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올해 아버지가 은퇴를 하시면서 그 계획이 구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전에 부산 근교인 밀양의 조그마한 땅을 계약하셨습니다. 저를 마중 나온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 땅을 제게 보여주기기 위함이었습니다. 평생 땅 한평 갖지 못한 분들이셨습니다. 자식들 집마련해 주시느라 얼마 안 되는 땅을 마련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얼마 안 되는 돈을 보태드렸습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고 땅을 마련하고 집을 지어드리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현실때문에 죄송스럽더군요. 그래도 부모님은 오히려 고맙다고 하십니다.
다음날은 아침에 언뜩 신문을 보다가 대변항 - 이름이 좋죠 - 에 물반 멸치반이라는 기사를 봤습니다. 대변항은 부산에서 차로 약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습니다. 넌지시 멸치회를 먹어볼까요라고 권하니 부모님들이 흔쾌히 채비를 하시더군요. 대포항에서 선착장 곳곳에서 멸치를 터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멸치회가 어떻냐구요? 별맛 없습니다. 멸치살이 너무 연하기 때문에 씹는 맛도 없답니다. 싱싱한 멸치와 꽁치를 사 와서 몇일간 꽁치국과 멸치국을 실컷 먹었습니다.
근 1년만에 아버지와 목욕을 했고 대포한잔도 했습니다. 사나흘간 어머니가 해 주시는 밥을 먹고 뒹굴거리다가 다시 전쟁터로 돌아왔습니다.
가 봤어야 하는데 대전 상황이 여의치 못해 죄송스럽게 되었습니다. 엠에이 식구들이 많이들 가서 애썼다는 얘기를 전해들었습니다. 저는 그런자리에서 늘 이런 느낌을 받습니다. 돌아가신 분 때문에 슬픈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 때문에 슬프다고.
그렇지만 있는 이들이 극복하고 힘을 낸다면 가신 분의 발걸음이 가볍울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있는 이들이 극복하고 힘을 낸다면 가신 분의 발걸음이 가볍울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몇일간 많이 힘들었겠죠. 몸보다는 마음이 더더욱. 이제 힘을 냈으면 좋겠네요. 제가 기억하는 그런 밝은 얼굴로 다시 봤으면 합니다.
참고로 제가 주머니를 탈탈털어내는 바람에 - 이전에는 가진건 돈밖에 없다고 했지만 - 이제는 가진건 집과 차용증서 밖에 없습니다. 
제가 술사고 있지만 정말 능력이 안 되어서리 ... 그쪽에서 내셔야 할듯 ...

제가 술사고 있지만 정말 능력이 안 되어서리 ... 그쪽에서 내셔야 할듯 ...
그럼 ...










